짧은 글

멸망이 다가온다면 개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방공호를 지어 그 안에 틀어박혀야 할까. 한 줌의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까. 아니면, 얌전히 앉아 끝을 기다려야 할까. 글쎄,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중간 과정들이 아니었다. 처음 멸망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죽어가며 별을 세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매연을 뿜어내는 회색빛 도시 깊고 깊은 곳. 기계 소음으로 가득찬 공장을 지나고, 알싸한 약품 냄새로 가득찬 약품실을 지나면 거리 한 켠에 조그마하게 마련된 과학자의 연구실이 있었습니다. 과학자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주는 일거리를 해결하면 겨우겨우 먹고 살만은 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01. 숲의 괴담

숲 근처에 위치한 어느 한적한 마을에는 유명한 괴담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밤 중에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면 허공에 떠다니는 푸른 불빛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 불빛을 따라가면 넓게 펼쳐진 화원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화원의 주인은 포악하고 잔인해서, 자신의 화원에 인간이 들어오면 한 치의 용서도 없이 목숨을 빼앗고 화원의 비료로 쓴다...

그라인더 속의 커피 원두가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귓가를 간질이는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원두의 잔잔한 향이 P의 코 끝을 맴돌았다. P는 이 순간이 좋아했다. 소리도, 향기도 자신을 가득채운 듯한 순간. 언뜻 따뜻함까지 느껴지는 듯한 순간. P는 속이 답답할 때면 이 순간이 항상 떠올랐다. P는 잘 갈린 원두 가루가 날리지 않게 모아 커피 필터 위로 쏟아...

이불을 턱 끝까지 잡아 당겨 폭 덮고 누워있다보면, 가끔 이불이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이불이 해오던 말들은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의 안부를 묻기도 했고, 기분을 묻기도 했고, 날씨를 묻기도 했다. 이불이 그렇게 내게 물어오면 나는 어김없이 내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늘어놓았다. 폭신함 속에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불과 떠들다보면 나는 어...

무지개의 꿈을 꾸었다. 열 두 빛깔을 가진 무지개는 내 시야를 가득 메웠고, 나는 어느샌가 무지개 위에 발을 딛고 서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무지개의 찬란함을 감상했다. 언제까지고 이 곳에 있으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게 무지개는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강물처럼.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다. 무지개는 아주 아주 천천히 흘러갔고, 나는 평...

아이는 어렸다. 가진 것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어린 아이. 아이는 스스로를 탓하며 끊임없이 울었다. 해가 등을 덥히고, 달 이슬이 뺨을 적셔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울었다. 아이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질없는 것들을 위해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는 몇날을 걸쳐 울었다. 아이는 울면서 과거의 일들을 떠올...

청량한 그 사랑

그는 P의 혀 끝을 살짝 건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톡톡거리며 혀 전체를 차갑게 감싸안았다. P는 그의 톡 쏘는 감촉에 혀를 움찔거리며 피하려 하였으나 그는 P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P는 눈을 꼭 감고 이 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P를 놓아주었다. P는 입 안에 남은 그의 흔적을 천천히 다듬었다. 알 수 없는 청량감에 P는 가볍...

한 밤의 뜨거움

그는 조용히 P의 입술을 훑었다. P의 입술은 빨갛게 물들었고, P는 조심스레 숨을 내뱉었다. 조금 상기된 P의 볼을 따라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P는 조금 당황했는지도 몰랐다. 그의 맛은 P의 생각보다 조금 더 강렬했다. 조금 더 거셌고, 어쩌면 P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벅찰지도 몰랐다. P의 마음과 다르게 그의 살결은 형광등 아래서 윤기를 내며 반짝거...